하루를 눌러 담다(일기)/사이의 순간들

세상 사람들이 10명이라면.

honeymung 2025. 5. 11. 14:11

 

4명은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

3명은 내가 뭘해도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 

3명은 내가 뭘해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인생에서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 3명을 만나는 경험 자체가, 

이 구조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힘들고 어려운 순간에 흔들리지 않게 딱 잡아주는 역할을 하는 듯 싶다. 

 

강서 터키디저트 맛집 소사크

 

20대 중반, 갓 사회 생활, 병원에 입사한 내게 

서울은 굉장히 자극적이고 놀거리가 많은 곳이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이 모든 건 함께 즐길 수 있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는 걸.

 

지방에서 졸업하자 마자 바로 올라온 나는 

끽해봤자 있는 친구라고는 동기들밖에 없었다. 

 

그러다 우연찮게 들여다 본 커뮤니티에서 '오늘 시간 되시는 분' 이라는 글이 딱 들어왔다. 

원래 같으면 그냥 시덥잖게 넘어갔을텐데 

이 날따라 '무슨 연유에서인지 심심한데 나가볼까?'라는 생각이 들어 약속을 잡고 그 장소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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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살 밖에 차이 안나는 동생이었는데

너무나 신기하게도 같은 간호학과에, 전라도 학교였다. 

 

성향도 너무 비슷해. 가치관도 너무 비슷해. 

무슨 운명의 단짝이라도 만난 것처럼 편했다.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어 1년에 한두번씩은 연락하며 꼭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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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 서로의 미래에 대해 고민이 많던 시절.

주변 친구들은 다들 결혼, 연애에 목 말라 있는데

이런 내가 이상한건지, 왜 다들 결혼, 남친 얘기만 하는건지 회의감이 들던 날

마침 이 친구한테 연락이 왔다(나는 동생들도 인생의 동반자, 친구라고 말하는 걸 편해한다). 

 

" 언니, 내가 캠핑을 좋아하게 됐는데. 나랑 같이 캠핑 가볼래? "

 

진짜 이 친구 앞에서 술 먹고 망나니 된 모습, 못 볼꼴 볼꼴 다 봤는데

"언니, 그럴 수 있지. 나는 술 안먹지만 술 먹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그 한 마디가, 술 먹고 실수한 내게 굉장히 큰 위안이 되었다.

 

이 친구는 나 자체를 바라봐주는 친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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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 덕분에 캠핑에 빠지게 되었고, 

백패킹에 빠지게 되었다. 

 

백패킹 장비는 내게, 캠핑장비는 이 친구에게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환상의 콤비였다. 

 

더군다나 여행 스타일도 잘 맞고

계획하는 스타일도 갑자기 꽂히면 바바박 아이디어 뱅크마냥 후루룩 나와서 

진짜 시너지가 폭발 그 자체였다. 

 ENTP와 ENFP 그 자체(이때 당시엔 내가 ENFP였음).

 

여름 장마도 우리를 막을 수 없어, 매년 여름엔 매주마다 강원도 동해바다에 놀러갔고

겨울엔 매달 한번씩 캠핑을 갔다. 

 

11시 전에 취침, 5-6시에 기상. 

생활패턴도 딱 맞고,

조용히 뚝딱뚝딱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각자 할일을 도맡아 텐트랑 장비 순식간에 완성하는 식으로 

그 어떤 누구보다 함께 다니기 너무 편했다.

 

다이소에서 산 은박지 라면냄비가 탈 줄 모르고 불 위에 그대로 올렸더니

활활 타오를 때

" 꺄!!언니!!!! 이거 타!!!탄다타!!! "

- 조용히 찬물 가지고 가서 붓는 나

 

얼마나 깔깔 댔는지.

30대 초, 이렇게 우리의 2-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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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내가 백패킹 모임에서 남자를 만나게 됐는데

내가 이중약속을 한 뒤, 헤어지고 이 친구와 만나 그 시간에 그리 집중하지 못했나보다. 

계속 이 남자애한테도 연락이 오고.

 

"나 지금 친구랑 있잖아. 끊어~"라고 했는데도 계속 연락이 오니 

이 친구도 좀 기분이 언짢았나보다. 

 

아마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남미새 모먼트라 친구가 멀어져야겠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다.

호주로 워홀 간다는 친구에게

"응원할게. 너는 잘 할거라고 믿어."라는 말을 끝으로 우리의 인연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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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종일 카톡하며

하루종일 일상 얘기하고(9 to 6, 일할 시간에만ㅋ)

하루종일 욕했던 친구였는데

 

어느샌가 연락의 텀이 줄어들다가

갑자기 이런이런 부분이 서운했다. 나는 이제 호주 가니, 나중에 시간되면 만나자는 말이

'아, 이친구 지금 나랑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는구나'가 느껴졌다.

 

나중에 시간되면 만나자는 말도 형식적으로 하는 말이구나. 안 볼 것 같다. 

생각이 들어 '아니야~ 만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나는 널 멀리서라도 응원할테니 잘살아~' 말했다. 

 

사실, 인연은 다 시절인연 아니겠는가.

지금 친한 친구도 나중엔, 어떤 상황에 따라 멀어질 수도 있는거고, 가까워질 수도 있는거고.

멀어지는 친구를 굳이 붙잡으려 하는건 나의 욕심이라고 생각했다. 

이런게 사실 어릴적부터 자연스러웠고. 

 

그래서 뭐, 아쉽다거나 서운하다거나 그런 건 없었다.

 

강서 터키디저트 맛집 소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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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30대 중반, 갑자기 호주에서 연락이 왔다. 

나에게 제일 먼저 사과하고 싶었다고.

 

근데 참 신기하지 ? 

오히려 반가웠다. 예전의 그 함께 지냈던 순간들이 떠오르며 너무 좋았다. 

그리고 언젠간, 연락이 올 것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잘 적응 중이며

조만간 귀국 예정이라고 했다. 

 

진짜로 이 친구의 삶을 응원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아.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항상 이 친구를 생각하면, 조금은 행복하길, 조금은 여유롭길 기도했는데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아 괜시리 엄마마냥 마음이 안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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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귀국 후 오랫만에 이 친구를 다시 만났다. 

근 4-5년만인가.

세월이 무색하리만큼, 그 긴 시간동안 나도 달라지고, 이 친구도 달라졌는데

둘이 이야기하다보니, 예전의 그 친구와 나의 모습이 나온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감싸주고

서로의 인생을 응원할 수 있는 친구가 

진정한 친구 아니겠어.

 

 

사람을 만나고, 잃고, 또 다시 만나는 일을 반복하면서,
‘영원한 인연’이라는 말이 사실은 순간의 진심 위에 만들어진다는 걸 배워간다.

시간이 흘러도, 서로를 기억하고, 다시 마음을 열 수 있는 인연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참 고맙고 귀한 일 아닌가.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따뜻한 사람으로 남는,
그렇게 다시 손 내밀었을 때 반갑게 웃으며 맞이할 수 있는 사람으로.